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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알튀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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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기존의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비판하고 스피노자주의와 프랑스 과학철학을 기반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재해석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여러 이론들과, 그가 가르친 수많은 제자들은 21세기 현재에도 철학, 미학, 사회학 분야에서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2. 생애[편집]
알튀세르는 프랑스령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톨릭 환경에서 성장했고, 1939년 고등사범학교 합격 후 바로 징집(…), 포로가 되어 5년간 독일 수용소에서 지냈다. 이후 가스통 바슐라르에게 수교하고[3] 헤겔에 대한 논문을 작성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8년에는 고등사범학교에서 교수자격시험 담당 철학 교수(카이만)로 재직하였다. 같은 해 프랑스 공산당에도 입당해서 좌파 학생 그룹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고등사범학교의 교수로 약 30년을 재직하면서, 고전 철학을 강의하고 교수가 될 학생들의 임용 시험을 도와주고, 시험지를 첨삭해주는 일을 맡았는데, 이 때문에 당시 고등사범학교에 다니던 거의 모든 프랑스 철학자들이 알튀세르 밑에서 철학을 배웠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름만 나열해도 나중에 알튀세르의 조교가 되는 미셸 푸코[4] , 자크 데리다를 위시해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샹탈 무페, 자크 비데, 피에르 마슈레, 에티엔 발리바르 등 엄청난 수준이고, 같은 대학에 재직했던 모리스 메를로퐁티, 피에르 부르디외와도 활발히 교류했다. 그가 가르친 것은 마르크스 뿐만 아니라 장 자크 루소, 몽테스키외를 위시로 한 서양 고전 철학 전반이었고 이 방면에서도 알튀세르는 상당한 학문적 성과를 낸다.[5] 푸코가 회상하길 알튀세르는 메를로퐁티에 비해 수업은 대충 했는데, 시험지 첨삭과 학생별 개별 상담을 잘해줘서 학생들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1965년에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한 공동 저작[6] 인 『자본을 읽자』를 출간해서 엄청한 관심을 끌었다. 그는 이 책들을 통해 좌파 지식인들에게 "어떤 현대인도 야기시키지 못한 열정, 열광, 모방의 대상"[7] 이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세계 혁명의 비밀스러운 교황"[8] 처럼 보였다. 1969년에 『레닌과 철학』을 썼고 1970년대 말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 포기 등 프랑스 공산당의 노선 전환을 비판했으나 죽을 때까지 당적은 유지했다.
1968년 68혁명을 기점으로 알튀세르는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미셸 푸코 등 자신의 제자들과 사상적 견해 차이로 결별을 겪게 되며[9] , 이는 알튀세르에게 큰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젊었을 때부터 정신병적 우울증 증세로 치료를 받고 있었던 알튀세르는 상기한 이유와, 68혁명의 실패, 소속 정당인 공산당에서의 소외[10] 등으로 70년대 후반에 들어 정신착란이 심해졌다. 그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한 담당의사는 안이하게 알튀세르의 외출을 종종 허락했고, 그러던 1980년 11월 16일, 허가를 받고 병원에서 나온 알튀세르가 정신착란 속에서 자신의 부인을 목 졸라 죽이는 비극이 벌어졌다. 다음 해 금치산자 판정을 받고 법적 책임을 면책받았으나, 이 사건은 알튀세르의 명성을 심각하게 손상시켰고 알튀세르는 사회적 발언권을 박탈당하며 철학계에서 퇴출된다.[11] 이후에도 보호관찰 상태에서 파리 북부의 한 아파트에 머물면서 비공개적으로 저술활동을 했지만 학계에서는 거의 잊혀진 채로 말년을 보내다가, 1987년 식도 폐쇄로 응급 수술을 받은 뒤로는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고 1990년 10월 22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 당시 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비롯한 비공개 원고들은 1990년대 후반부터 2020년대까지 꾸준하게 발굴되어 뒤늦게 마르크스주의 철학계에 파장을 안겼다.
3. 사상[편집]
가스통 바슐라르의 프랑스 과학철학과 스피노자주의를 바탕으로 한 독특한 마르크스주의 독해로 잘 알려져있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에서 고의적으로 그 영향력을 간과해온 상부 구조의 '중층 결정' 개념과 이른바 '이론적 반인본주의'[12] 로써 특유의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독해를 제시하였다. 좌파 정치 철학과 포스트모더니즘, 문화 이론 등에서 영향이 지대하지만, 정작 본인의 이론과 지향은 초기 구조주의자로서 주로 포스트구조주의 계열의 후배들과는 꽤 상이하다. 그럼에도 슬라보예 지젝, 샹탈 무페, 자크 랑시에르, 알랭 바디우 등 그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계속 학계에 모습을 비춤으로써 알튀세르주의의 영향은 현재 진행형으로 후대 철학자들에게 계승, 발전되고 있다.
또 청년 마르크스주의를 되살리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에티엔 발리바르 등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자뿐만 아니라 미셸 푸코 등 다른 분야의 철학자도 그의 지도를 받았다. 알튀세르와 단절하지 않고 그의 연구를 발전시키려고 하는 '알튀세르주의자'로는 대표적으로 에티엔 발리바르가 있고 그 외에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알튀세르주의자로는 자크 비데[13] , 피에르 마슈레, 도미니크 르쿠르, 미셸 페쇠, 샤를르 베틀렘 등이 있다.
21세기 들어, 우발성의 유물론을 비롯한 알튀세르의 후기 저서들이 속속 출간되며 국내외로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보다 늦은 2010년대 후반~2020년대 초반에 들어서야 알튀세르 후기 저작들이 소개되어, 다소 뜬금없이 201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알튀세르 관련 책들이 꽤 출판되고 있기도 하다. 그와 별개로 한국에서는 고려대학교 교수인 진태원[14] 이 꾸준히 알튀세르 재평가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특히 스피노자-알튀세르 관련 연구로 권위가 있다.
3.1. 마르크스 독해: 인식론적 단절론[편집]
알튀세르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 개념을 빌려 마르크스의 텍스트들을 재해석하고자 한다. 그는 '청년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의 동일성' 테제를 부정한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사상이 1845년을 기점으로 '단절'을 맞이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청년 마르크스의 문제'라고 부르는데, 1845년 이전의 소위 '청년 마르크스의 사상'은 1845년 이후의 마르크스의 사상과 연속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단절을 증명하기에 앞서 알튀세르는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는 철학자들에게도 '청년기'가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 둘째는 철학자라는 한 인간을 둘러싼 현실(이데올로기적 장)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를 인정할 때, 청년 마르크스는 분명 독일 이데올로기, 더욱 구체적으로 1840년대 청년헤겔주의, 특히 포이어바흐적 헤겔주의의 영향 아래 위치한다. 그러니, 청년 마르크스의 "문제설정"은 <자본>의 마르크스의 것이 아닌, 포이어바흐의 문제설정이다. 알튀세르는 1845년 이전의 텍스트들에서 보이는 <자본>의 개념들, 예컨대 소외 개념을 분석하며 그것이 <자본>의 문제설정과는 상이한 포이어바흐적 문제설정에서 유래한 것임을 부연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1845년이 '단절'인가? 알튀세르에 의하면 하나의 '이데올로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뒤로 돌아오기"(Retour en arrière)의 경험이 필요하다. 마르크스는 1844년 헤겔 텍스트의 대상, 즉 18세기 말-19세기 초의 사회를 직접 대면하면서, 또 1845년 영국과 프랑스로 떠나 현실이 '독일의 신화'와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본인의 이데올로기적 장의 뒤로 돌아오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3.2. 중층결정된 모순[편집]
'중층결정'의 개념은 "어째서 혁명이 러시아에서만 발생했냐?"는 질문에 대답하며 이해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공산주의 혁명은 '경제적 모순의 심화' 그 자체로 발생해야만 하는 것인데, 현실에서 혁명은 자본주의가 가장 발전한 영국도, 그 다음인 프랑스와 독일도 아닌, 유럽에서 가장 '봉건적'인 러시아에서 발생하였다. 이 문제에 레닌은 러시아가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약한 고리"였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데, 이는 혁명이 '모순' 자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역사적/정치적 "정황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암시한다. 알튀세르의 '중층결정' 개념은 현실의 실천과 마르크스주의 이론 사이의 이 불일치를 조화롭게 해석하기 위한 것이다.
"모순"은 자신이 그 속에서 작용하는 사회적 몸체 전체의 구조로부터 분리될 수 없고, 자신의 실존의 형식적 조건들로부터 불리될 수 없으며, 자신이 지배하는 심급들로부터도 분리될 수 없다. (..) 우리는 그 모순은 그 원리상 과잉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 서관모 역, 180쪽
위 인용문에서 보이듯, 중층결정의 핵심은 하부구조의 모순이 혁명적 상황으로 치닫기 위해서는 상부구조의 정황들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상부구조의 정황들이 모순을 '과잉'결정해야만 혁명적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 주장은 사실 헤겔 변증법과 마르크스 변증법 사이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알튀세르 특유의 독해에서 유래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기존의 독해에서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헤겔 변증법의 '방향을 전도'한 것으로 이해된다. (헤겔의 관념론 대 마르크스의 유물론) 그러나 알튀세르는 이러한 독해에 따른 마르크스 변증법은 단순한 기계주의, 경제주의에 불과하며, 마르크스가 헤겔의 변증법과의 '전도'를 선언하였을 때 그것은 단순한 방향의 전도가 아닌, 헤겔 변증법과의 인식론적 단절이라고 강조한다. 알튀세르는 엥겔스의 텍스트들을 인용하는데, 엥겔스가 "생산은 최종심급에서 결정적인 것"이라고 주장한 것을 강조한다. 즉, 생산/하부구조는 오직 '최종심급'에서만 결정적이며, 그 최종심급이 도래하기 위해서는 상부구조의 제 정황들이 요구된다. 결국, 알튀세르의 중층결정론은 마르크스주의 특유의 이분법을 탈구축하고, 상부구조의 이론을 체계화해야 한다는 선언으로 이어진다. 예측할 수 있겠지만, 이 상부구조의 이론이 바로 이데올로기다.
3.3. 재생산[편집]
3.4. 이데올로기론[편집]
우선 이데올로기라는 개념notion은 알튀세르의 철학적 기획의 핵심을, 담론으로서의, 그리고 한 학문 분야로서의 철학에 대해 그가 맺고 있는 관계의 핵심을 구성한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은 철학으로 하여금 옳은 자기의식이든 그릇된 자기의식이든 간에 자신의 "자기의식"의 거울을 뚫고 나아가서, 자신의 물질적 가능성의 조건들과 관련해, 자신이 아닌 것의 장, 즉 사회적 실천들의 장 안에, 그렇지만 자신을 폐지하거나 "반영물"로 축소하지는 않고서, 자리잡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 〈1996년판 서문〉, 서관모 역
이데올로기는 역사적 존재에 대한 의식이 아니다. 즉, 그것은 "물질적 존재 조건들"을 (거꾸로이기는 하지만) 반영하고 "현실적인 것으로부터 얼마간 떨어져 있는"(즉 추상적ㆍ관념적인) 담론들로 번역되는, "사회적 의식 형태"가 아니다.[역주]
이데올로기는 그 속에서 개인들이 자신의 존재 조건들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상상적으로 사는 의식 및 비의식의 형태(인지 및 오인의 형태)이다.
--같은 글, 서관모 역
3.5. 우발성의 유물론[편집]
4. 비판[편집]
… 역자 서문에서 한심했던 과거를 떠올리는 것은 갑자기 톰슨(E. P. Thompson)의[15]
눈총이 따가워서다. 일찍이 톰슨은 알튀세르류의 '마르크스주의'를 겨냥하여 1960년대와 70년대 역사 유물론이 입은 상처는 경계가 분명한 부르주아 보수 진영의 공격보다 마르크스보다 훨씬 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선언했던 후방의 '진보 진영'으로부터 당한 기습 공격에서 더 컸다고 말하면서, 제대로 된 진보를 이루려면 이론의 유통 체계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톰슨의 이 지적은 마르크스나 마르크스주의의 이름을 달고 있다고 해서 모든 이론이 마르크스주의적인 것도 아니며, 심지어 '진보 진영'을 교란시킬 수도 있기 때문에 이론을 유통시킬 때는 상표가 아니라 내용을 보고 유통시켜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변상출,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16]
, 〈역자 서문: 다시 마르크스(주의)를 생각한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알튀세르에게는 이론주의적 시기와 정치주의적 전환의 시기를 관통하는 일관된 관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구별이다. 그런데 이 구별은 사회를 두 계층으로, 즉 생산하지만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 자들과 그들을 대신해서 사유하는, 사유를 자신의 고유한 임무로 삼고 있는 자들, 즉 철학자 혹은 지식인들로 분할한다. 이 점에서 알튀세르주의는 분할과 불평등의 논리다.
랑시에르는 이 분할을 통해 알튀세르에게서 정치는 소멸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알튀세르는 계급투쟁을 역사를 만드는 동력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대중이 한갓 스스로 사유할 수 없는 자들로 규정되고 있는 한에서, 정치적 주체화를 설명할 수 없고, 따라서 실제로 정치는 불가능한 것으로 남는다. 그 대신에 철학이 정치를 대체하게 된다. 정치를 봉쇄하는 이 분할의 논리는 이미 정치철학의 정초자였던플라톤에서부터 시작된 논리다. 즉 그것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대중들이 왜 정치에 참여할 수 없고 정치는 오로지 철학자들의 몫일 수밖에 없는지를 논증하기 위해서 생산자들과 철학자들 사이에 분할의선을 그을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박기순, 《포스트 알튀세르주의자들 - 3. 자크 랑시에르》中
5. 여담[편집]
-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도 구조주의자이다. 하지만 굳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라면,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일생 내내 마르크스주의를 개량하는데 학문적 헌신을 했고, 구조주의적 접근을 할 때 조차, 그것은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해석하기 위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후기에 '우발성(우연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모든 것이 구조로 '정해져 있다'는 구조주의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 일반적인 철학자의 이미지와 달리, 글을 상당히 유려하게 잘 쓰는 편이다. 이는 스피노자와 몽테스키외 등 고전 철학자를 연구하며 복잡한 라틴어 체계까지 공부해야했던 그의 경력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의 삶을 철학적으로 조명한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서 알튀세르 특유의 문체를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문체를 철학 서적과 논문에서도 그대로 사용해서 독해가 상당히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11월 16일 일요일 오전 9시,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그리고 그 이후 내가 결코 다시 들어갈 수 없었던 어둠에서 헤어난 나는 잠옷 차림으로 침대 발치에 있었고 엘렌은 내 앞에 누워 있었다. 나는 엘렌의 목을 마사지하고 있었는데, 팔 아랫부분이 상당히 묵직하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 그 마사지였다. 그러고 나서 나는 엘렌의 두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과 이와 입술 사이로 그 처량한 혀끝이 비죽이 나온 것 외에,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엘렌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내 아파트를 뛰쳐나와 소리를 지르며 에티엔느가 있다고 생각한 의무실로 뛰어갔다. 운명이 시작됐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中[17]
- 한국 좌파들 사이에서도 알튀세르는 상당한 인기를 얻었는데, 198~90년대 현실사회주의 진영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알튀세르주의의 논리가 많이 사용되었다. 특히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으로 대변되던 1980년대 운동권 그룹에서 기성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을때, 가장 많이 인용된 것이 푸코와 알튀세르였다. 한국에서 알튀세르 붐은 1990년대 후반 질 들뢰즈로 대표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과 함께 종식되었다가, 2010년대 중반 이후 지젝, 랑시에르 등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다시 유행을 타면서 재부상했다. 한국의 운동권 그룹 중 알튀세르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정파는 구 대장정에서 이어진 전국학생행진과 사회진보연대로 볼 수 있다.